11월의 해방일지,
요즘 제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이다.
생각해 보니 12월이 되었음에도 11월로 착각할 만큼 내 머릿속엔 11월이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야 11월을 놓아준다.
돌아보니 11월은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간 것 같다. 매달 인상 깊은 일들을 하나씩 만들어보고자 노력했는데 11월은 의도치 않던 일들이 꽤나 많이 생겨버렸다.
브런치의 시작, 오싹했던 산행, 연중행사 김장, 독감 같았던 감기, 아슬아슬했던 독서.
아날로그 감성,
11월 시작은 브런치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사실 브런치란 곳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브런치 작가분들을 알게 되며 드나들게 되었고 은근히 불편한 인터페이스에 혀를 내두르며 마지못해 찾아온다. 그냥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 게 더 편했다.
그런데 난 누군가로부터의 빈정거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블로그를 아주 오래전부터 운영해온지라 애착이 상당히 크다.
개인 일기장과도 같고 가끔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나 동생들이 찾아와 응원의 메시지도 달아주기도 하니 위로의 공간이기도 하다.
어느 날 한 작가의 글에서 블로그를 폄하하는 글을 보게 되면서 당장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한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대기업 입사라도 할 것인 양 장황한 자소서를 제출한 것 같다. 며칠 뒤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드는데 이게 막상 되고 보니 기분은 상당히 좋더란 말이다.
그 사람이 느꼈을 특권의식 같은 것도 느껴지기도 하고 의무감, 사명감이 몰려오지만 막상 작가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려하니 그동안 써오던 최신식 에디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쌍팔 연대 타자기를 들여놓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머 여긴 보는 것도 불편한데 쓰는 건 더 불편하네.'
한 번으로 되겠어?
더 추워지기 전에 마지막 산행 겸 백패킹을 위해 내가 사는 거주지 인근 산을 찾았다.
노숙을 통한 심신수양을 해보겠노라 백패킹을 하게 되는데 집 놔두고 한 데서 자는 게 사서 고생하는 건 맞는 말이다.
얼마 전 강원도 선자령을 다녀오며 그 감회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하지만 무게를 줄이고 줄이느라 최소한의 먹을거리만 가져가느라 춥고 배고픈 야영 덕에 이번엔 호화로운 야영을 계획했다.
배낭 무게만 이십 킬로그램을 넘어섰고 먹거리를 챙기니 이십사 킬로그램을 훌쩍 넘는다.
이걸 짊어지고 어찌 올라가나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극한의 고통을 맛본지라 꾸역꾸역 정상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내가 산행을 계획하면 꼭 비가 오는 온다. 아무래도 가뭄으로 고생하는 지역에 컨설팅이라도 다녀야 할 것 같다.
오후 5시경, 부슬비가 내리는데도 등산객들이 올라온다.
덕분에 텐트도 못 펴고 눈치만 보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게 산을 다니면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이 몰려오자 바로 하산을 결심한다.
그래도, 이번엔 산의 중간 지점인 사찰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아 부담은 덜했다.
'여기 또 오겠어?!' 하면서 차량 근처로 가는데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자동으로 펼쳐져야 할 사이드미러가 열리지 않았고 도어 버튼을 눌러도 열리지 않는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기 시작한다. 주변에 차량은 한 대도 없었고 어느새 날은 어두컴컴 해지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싶어 차량 옆으로 배낭을 풀어놓고 랜턴 하나 들고 산을 뛰어오른다.
중간쯤 올랐을까 누군가 멀찌감치 서 서있는 게 보인다. 여자 모습처럼 보였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나도 주춤거리며 올라갈지를 고민한다. 뭐 다행히도 사람이었지만 그분은 내 랜턴 불빛에 화가 났던 거였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머리 조아리며 다시금 뛰어 올라간다.
이때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아, 내가 이 산에 무슨 원수라도 진 건가,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하면서 제발 차 키가 나오길 간절함으로 기도해 보지만 역시 턱도 없었다.
정상까지 뛰어 올라갔지만 컴컴한 밤 속 불빛 하나로 작은 물체를 찾는 내가 한심스러울 찰나.
'누가 날 다시 부른 걸까?'라는 생각이 몰려오며, 온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결국 여름철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다 맞아 가며 쫓기듯이 하산하고 다음날 다시 찾아 키를 찾는다.
그것도 올라갈 때 안 보였던 키가 내려갈 때 벤치에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김장과 가출,
그리 힘든 일도 많고 온갖 와일드한 취미생활을 겪으면서도 '김장' 만큼의 격한 노동은 없어 보이는 건 뭘까.
어느덧 18년 차.
그 누구도 내 자리를 넘보지 못하는 무 썰기 자리에 올라앉아 유유자적 시간 재가며 무 썰던 그 시절도 엊그제다.
이젠 일손이 달리다 보니 장인(匠人)이고 뭐고 없고, 온갖 잡일은 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오래도록 한 해 거르지 않고 집안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연중행사를 벌일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매년 어찌 그리 미꾸라지 마냥 빠져나가는 얄미운 인물이 참 눈에 거슬린다.
김장은 이틀에 걸처 치러지기에 내 임무는 첫째 날 절반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첫날은 잘 보내나 싶었다.
한 번도 처갓집에서 큰 소리 내본 적 없었던 내가 미친놈처럼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끝내 대중교통 끊어지지가 바로 전 그 외진 시골 마을에서 뛰쳐나오며 세상에 온갖 고통과 설움 다 짊어지고 마지막 버스에 올라탄다.
왜 그랬을까.
몇 시간 잠도 못 자고 불야불야 택시 타고 복귀했다.
김장이 있던 전 주말 무봉산에서 퍼붓는 비를 맞으면서 이틀 연속 오르내릴 때도 멀쩡 했던 몸이 김장을 마친 다음날 바로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준다.
목 안이 심하게 붓기 시작하더니 일주일간 침조차 삼키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밀려오고 수시로 밀려오는 몸살은 의욕상실을 불러오며 마치 내 죄를 물으며 심판하는 것만 같았다.
행여 코로나 인가 싶어 또 격리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이미 연차도 다 쓴 터라 가슴 조리며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의사 선생님.
그토록 주사 한방 놔달라는 간곡한 내 요청 무시하고 약으로 잘 버티라 하심에 일주일간 정신력으로 겨우겨우 버텼다.
결국 딸아이가 받아 왔던 목감기약 일 회분 먹고 말끔히 나아버렸다.
그래도 책은 읽었다!
브런치 글쓰기에 꽤 시간을 투자했고, 비장한 산행에, 감기로 인한 의욕상실, 여러모로 책 읽을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나름 일곱 권이란 책을 읽어 버렸다.
전달에 미리 다음 달 읽을거리를 구상해 놓지만 매번 다른 책을 읽는 거 같다.
역시 11월도 전혀 계획 없던 책들로 읽기 시작하는데, 그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의 책을 지난달 말 경부터 읽기 시작하며 한편으론 부족하다 싶어 세편이나 읽어 버린다. 참 독특한 세계관을 느낄 수 있었고, 나름 내 작품세계에 영향을 줄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데 말이지, 어지간하면 난 서평단 신청을 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 내에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부담도 있고 솔직히 난 재미없으면 도중에 책 덮는 스타일이라 리뷰라는 게 나올 수 없기에 서평단 모집 광고를 보더라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근데, 위화 작가의 '원청'이란 신작의 서평단 모집 광고를 보는데 이건 왠지 꼭 봐야겠다는 사명감이 몰려온다. 그리고 절실한 마음으로 신청하며 댓글에 한 줄 남긴다.
'꼭 읽고 싶습니다.'
책이 도착했다.
중요한 건 김장과 함께 감기가 불러온 의욕상실은 언 일주일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
데드라인 3일!
'이래서 내가 안 한다니깐!' 하면서 바로 고시생 모드로 돌변한다.
다행히도 주말에는 몸 상태가 좋아지니 오랜만에 스터디 카페를 찾았다.
늘 대중교통에서 책을 읽거나 집에서 읽어 버릇하다 고시 공부하듯 책을 읽는데, 어찌나 집중이 잘 되던지 우리 위화 선생님이 잊고 있었던 오래전 연인을 소환시켜주신다.
내가 뭐 수도승도 아니고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책에 나오는 '샤오메이'같은 연인이 있었고, 참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의 추억이 선하게 그려진다. 엄청난 카드빚 메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아주 그냥..!'
달력은 12월,
독서와 책 리뷰는 꾸준히 해오고 있었지만 내 글을 쓰지 못해 쉽던 찰나 달력을 보니 12월 하고도 닷새나 지나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책 한 권.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 이거 참. 내스타일이다!
덕분에 11월을 떠나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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